(역사연구 「투데이」) 1896년 3월 27일 – 의병장군 김백선 장군이 군사정권에 의해 처형됨



1896년 3월 27일 호좌의진(호좌는 충남)의 선봉장군 김백선(1849~1896) 장군이 문란죄로 처형당했다. 3월 16일 가흥(可興: Yingzhou)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결국 패하고 만다.
김백선은 본진으로 돌아와 중앙군 사령관 안승우(1865~1896)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검을 뽑아 항의했다. 그러나 안승우는 “대위를 경호하는 중군의 의무 때문에 함부로 병사들을 철수시킬 수 없었다”고 답했고, 이 광경을 목격한 호좌의진 단두대 유인석(1842~1915)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까.
“원래 청소부일 뿐인 상민인데 어찌 진영을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안녕하세요! 군법 위반 저작자를 처벌하고 죽여라!”
산악포병들과 함께 충주성을 점령한 호좌의진 선봉대 김백선은 다른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당했다. 제천 의병의 주력 김백선은 자신이 이끄는 산병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현 양평) 출신의 평민이다. 가난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정신과 용기는 남달랐다. 본명은 도제(道濟)이고 원래 산포수 출신이다. 갑오농민항쟁(1894) 때 도적이 도적질을 하자 당시 지평을 담당하던 맹영재와 함께 산지기들을 모아 섬멸하였다.
상민 포로에게 3급 장군이 된 것은 엄청난 사회적 진보였다. 이 신분 변경으로 그는 상민으로서 의병의 대장이 될 수 있었다.


이듬해(1895년) 겨울,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분노한 김백선은 지평군수를 맡고 있던 맹영재를 찾아가 창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눈을 뜨고 꾸짖었다.
산포수 의병 김백선
“너희가 이런 큰 일이 있을 때 그 나라의 국민이라면 크건 작건 목숨을 걸고 살아서 싸우면 의인이 되고 죽어도 의인이 된다. 영혼. 그리고 군부 아버지에게 모욕당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고, 아랫사람의 죽음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문장을 쓰고 관공서에 앉아 있는 하인으로서 무엇을 하겠는가? 동비를 꺾고 관직에 오른다면 무슨 영광이겠습니까?”
김백선은 들고 있던 총을 부수고 관아 뜰에 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유학자 이춘영(1869-1896)이 나타나 호국을 제의했고 두 사람은 동의했다. 김백선은 지평관아에서 포병 400여 명을 모아 현 상황을 규탄하고 호소했고, 모두 그의 뜻을 행하기로 했다.


김백선은 1896년 1월 이웃한 도인 강원도 원주시 안창리에서 이춘영과 함께 이 해산자들을 이끌었다. 맹영재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원주에서 군대를 일으킨 사람들을 지평의병이라고 한다. 이춘영과 함께 안승우, 화서 이항로의 가상인물, 평민들이 합류했고, 의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원주 관아를 점령한 후 의병 지평군은 제천으로 진출하였다. 1896년 2월 7일 영월에 있을 때 의암 유인석이 대위로 부임하여 소총병을 강조한 지평의병과 유교군을 합친 의병부대 호좌의진이 탄생했다. 제천의병을 중심으로. 의진은 중장 이천영, 전직 무사 안승우, 전위 김백선으로 구성됐다.

2월 11일 제천에 입성한 호좌의진은 단양과 청풍을 거쳐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했다. 충주성 함락의 공적은 산악포병의 선봉대를 지휘하여 동문을 돌파하고 그날 새벽 성문을 연 김백선이었다. 의진은 충주지사를 응징했지만 2월 23일 수안보 전투에서 사령관 이춘영을 잃었다. 결국 계속되는 정부와 일본의 공격으로 의진은 충주성을 버리고 3월 5일 제천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선을 편성했다. 3월 18일부터 의진 전위 김백선은 가흥(경북 영주)과 수안보에 있는 일본군 보급기지를 이틀간 공격했다. 기지 점령 당시 과중한 과부하로 사령부에 요청한 지원군이 오지 않아 기지 점령에 실패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은 점령 직전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전투의 실패를 아쉬워했을 것이지만, 중앙군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안승우의 선언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칼을 뽑고 반역한 김백선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했지만,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주장하고 처형을 각오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였을 것이다.
“적은 앞에 있고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므로 일반 병사라도 최대한 단결하여 병력을 늘려야 한다. 그의 유일한 죄는 순간을 잡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개혁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아낌없이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들 사이에 우여곡절이 있을 텐데, 군권을 빼앗긴 것이 부러운 일인가. 서민들에게 모욕당하는 것이 원망스럽기 때문이었을까? 원래 의지가 적을 굴복시켜야 한다. 가흥 전투 때 백선은 안승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군대를 보내지 않아 백선이 패하고 의병들이 사기를 꺾어 그의 진노가 가능했을 것이다.
한 가지로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적을 제압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이고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럼 제천의 패배는 당연하지 않나.
– 송상도(1871~1946), 『명예수필』 중에서
김백선의 처형은 유학자들의 이념적 경계로 이어져 유학자와 포군 사이에 불화를 불러일으켰다.
김백선의 처형은 당시 의병 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양반과 서민 사이의 신분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양반 유생의 지도부 사상적 한계도 드러냈고, 평민이자 무신인 김백선의 처형 이후 양반 유생과 제천의진 지도부, 의병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김백선의 처형은 의병 진영에 참혹한 영향을 미쳤다. 포병들의 부러움을 샀던 전설의 호좌의진 장군 김백선이 처형되자 그를 쫓던 지평 포병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관계자들도 부대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흩어진 자들이 사라진 의진은 하나 둘 패했다. 사수들은 이른바 ‘산포체제’를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조직력이 컸고, 화승총보다 성능이 뛰어난 산탄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진의 실전 전력이었다.
5월 25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거센 공격 속에 패한 제천 의병은 느린 길을 택했다. 이후 의병은 단양, 충주, 원주, 영월, 춘천, 양구, 안변, 영흥, 맹산, 덕천, 운산을 거쳐 8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초산에서 중국 회인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회인현에서 무장 해제되어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68년 김백순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1년에는 국가훈장 애국훈장(4급)을 받았다. 유인석 대위가 2급 대통령 표창장을, 안승우·이천영이 독립증서(3급)를 받은 것에 비하면 형벌이 가혹할 수밖에 없다. 김백선이 군기 위반으로 처형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김백선의 묘는 그가 태어난 청운면 갈룬2리 하갈마을 낮은 구릉과 그 옆 갈룬1리 아실마을에 있다. 김백선의 묘 바로 옆에는 그가 전장에서 즐겨 탔던 말 천비마의 묘가 있다. 한편, 양평군에서는 의병 수뇌부의 묘소를 모은 의병묘지를 조성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8. 3. 26일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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